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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단체] 대한민국의 4월 그리고 한국교회
"아물지 않고 치료되지 못한 4월,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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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국장 기자 작성일2020-05-0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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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T.S. Elliot은 ‘죽은 자의 매장’이라는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했다. 시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살아있으나 활기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희망도 미래도 없는 암담함으로 정서적으로 죽어버린 사람들을 매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희망이 없음을 예견한 것이다. 

역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역사를 통한 반성과 교훈이 필요하다. 장로신문사는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장로들을 위한 특집을 준비하였다. 우리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장한 복음의 용사로서 이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 나아가고,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섬기는 일도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역사가 거울이 되고 밝은 미래를 준비하는 기틀이 되어야 한다. 장로는 후손들에게 존경을 받는 역사를 남기도록 장로신문사는 성숙함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1592년 4월, 조선 땅이 짓밟히고 처절하게 유린당한 아픔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조선 선조임금 25년인 1592년 4월에 일어난다. 스페인 귀족 출신이며 천주교 예수회의 창설 멤버인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주군을 배신하고 하극상으로 등극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화승총’을 전달함으로 일본을 지배하게 하였다. ‘노부나가’는 불교를 도외시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문화와 문명, 예수회 소속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노부나가’는 대륙 진출의 꿈이 있었지만 이루지 못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실제로 일본을 통일하고 주군의 꿈을 대신 이루려고 하였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과 ‘기리시탄 영주’들을 거느린 예수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수회 소속 책임자(코엘료)’에게 ‘포르투갈 군함’과 후원을 요청하면서 대륙을 점령하면 곳곳에 천주교가 전파되도록 선교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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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살을 도려내어야 했던 4월은 ‘예수회 소속 신부들의 야망과 히데요시의 야망’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왜군들의 깃발에 십자가와 천주교의 표식’이 있고, ‘무장하지 아니한 검은 복장의 신부’들이 왜군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천주교의 반민족적인 만행은 일제 침략기에도 이어졌다.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비단에 한 줄에 110자씩 121행, 합계 1만 3천여 자를 먹으로 작성한 ‘황사영의 백서’가 1894년 갑오경장 이후에 조선 교구장 ‘뮈텔’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천주교를 박해한 사실을 확인한 ‘뮈텔’은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깔보고 무시하였고, 교회의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책략을 구사하였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하여 항일운동 자체를 반대했으며, 3.1운동 때는 천주교인과 신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엄격히 금지하게 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단 한 명의 천주교인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48년 4월, 참혹한 피비린내 진동한 이념 투쟁의 탐라국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 4.3사건’이다. 이 사건은 아주 복잡한 배경을 안고 있는 민족의 또 다른 아픔이다. 

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 3.1절 기념식에서 기마 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 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경찰서에서는 이것을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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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 군정’과 ‘대한민국 경무부’에서는 제대로 된 진상조사도 없이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한 정당방위 사건’이라고 발표함으로 심각한 민심이반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민심을 ‘남로당(남조선로동당)’은 잘 활용하였다.남로당의 활동으로 제주도청의 총파업(3/10)을 시작으로 23개의 행정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제주 직장인 95%를 비롯하여 경찰의 20%도 파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한편, 1946년 3월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이 소련 군정과 김일성에 의해 감금당하자 지주와 기독교인 등은 남한으로 내려왔고, 그해 11월 우익단체들과 당시 ‘영락교회 청년회’ 등이 통합하여 YWCA에서 서북청년회(약칭, 서청)가 결성하게 되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장택상, 조병욱 등이 지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청(西靑)’이 제주도의 경찰 파업으로 인한 파면된 경찰의 공백을 채우는 일에 가담하게 되면서 ‘남로당이 지배하는 제주도민’과 ‘경찰(군정), 서청’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점점 커지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 등 350여명이 무장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함으로 ‘제주 4.3 사건’이 터진 것이다. 작은 우발적 사건들이 좌익과 우익의 세력 다툼으로 발전되면서 우리 민족이 아직도 가슴 속에 울분을 삼키고 있는 큰 아픔이 된 것이다. 

 

1960년 4월,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정권을 바꾸었던 학생혁명

역사의 시계를 조금 더 뒤로 돌려서 1895년 4월 2일에 가 보고자 한다. 조선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양녕대군’의 후손이지만 적자가 아니고, 몰락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피폐함을 극복하려고 과거 시험을 준비했으나 그마저도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던 20세의 청년이 있었다. 그는 서양 학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부모의 맹렬한 반대에 제대로 상의하지도 못한 채 배재학당을 다녔으며, 소련이 절영도(부산, 해양대학교가 있는 섬)를 요구하는 일에 반대하는 일 등으로 ‘한성 감옥’에 투옥된 청년도 아픈 4월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다. 그는 합리주의에 뿌리를 둔 미국 사회가 조선을 마치 ‘테러리스트’로 치부하는 시린 가슴을 안고, 1919년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하여 군중시위를 필요성을 국내로 전달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 16명을 관여시키는 이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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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운동은 조선이 독립 국가를 향한 처절한 부르짖음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는 8곳이나 생기게 되고, 8곳에서 모두 4월의 아픔을 품은 이 청년을 중요한 자리에 추대한 사실에 관하여 우리의 역사는 많이 소개하지 않았다. 

‘대한국민회의’(노령, 국무총리), ‘조신민국임시정부’(평안도, 내각총무),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해, 국무총리), ‘신한민국임시정부’(평안도, 국방총리), ‘한성정부’(서울, 집정관 총재), ‘대한민간정부’(기호, 국무총리), ‘임시대한공화정부’(간도, 국무급 외무총장), ‘고려임시정부’(간도, 국무총리) 등이다. 

 

신학문을 받아들인 4월의 이 청년은 미 군정하에서 실시한 ‘제헌국회(1948년 5월 31일)’를 통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과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신탁통치 반대와 반공(反共)사상’으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아내었으며, 6·25 한국전쟁으로 열강들의 입김이 커지고 대한민국 정부를 포기하려는 일이나 당사자인 대한민국을 제외한 휴전협상 등에 대하여 당당히 맞서서 이 나라를 지켜내는 국가적인 공로가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 청년에게 또 다른 4월은 더 쓰라린 4월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가슴에 묻어야 했던 4월은 ‘오욕(汚辱)의 역사’를 만들게 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한 그의 모든 수고가 한순간에 무너진 4월 학생혁명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 시린 4월을 비난하지 아니하였다. 수용하였다. 학생이 부상당한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병원에 달려가 문병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선거를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오전, 이승만은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고통스러운 4월을 품었던 그 청년 뒤늦게라도 ‘민의(民意)’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사실, 4월 혁명은 ‘종신집권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평불만 누적’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는 자신의 종신집권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숱한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점차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항상 ‘과욕’이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자유당의 12년 장기집권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고 새로운 공화정을 위한 준비를 위해 허정(許政) 과도정권(過渡政權)이 뒤를 이었고, 국민은 민주주의를 갈망했지만, 이듬해 군사혁명은 역사의 시계는 다시 뒤로 향하게 하였다. 

 

2014년 4월, 대한민국의 시계를 멈춰 세었던 세월호 참사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처음 건조된 여객선, 일본에서 ‘페리 나미노우에(파도의 위)’라는 이름으로 2012년 10월까지 18년 동안 가고시마와 오키나와 사이의 여러 낙도를 운항했다. 이후 한국의 청해진해운이 이 배를 중고로 도입해 6개월 정도의 수리 기간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객실 증설 공사를 진행해 총톤수를 6825t으로 늘렸다. 또한, 승객 정원도 일본 운항 때(804명)보다 117명이 많은 921명으로 늘려,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했다. 이미 예견된 참사의 역사를 우리는 너무 늦게 인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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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4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다. 특히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탑승해,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선장이 승객을 외면하고 배에서 먼저 탈출해 버리는 파렴치함은 우리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었다. 

 

2020년 4월, 부활주일 연합예배조차 멈추게 한 ‘코로나 19’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스텔스 바이러스’ 칭하는 ‘COVID(코로나) 19’는 2020년의 봄을 꽁꽁 얼려 버리고 말았다. T.S. Elliot의 시와 같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가 아니라 불모지와 같은 땅으로 변하려고 한다. 

교회의 예배가 마치 바이러스 감염의 원인으로 치부하는 모양은 너무 불편한 현실이다. 정부가 다중이용시설을 먼저 통제하지 않고 ‘이단, 사이비, 유사기독교’이며 종교 사기 집단인 ‘신천지’를 대항하다가 ‘교회’를 향하여 화살을 돌린 것은 지나친 염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시계를 멈추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다. 정부의 예방 수칙을 준수하는 것을 넘어서 더 적극적으로 방역을 하고, 마스크를 만들어서 나눠주고, 활동이 불편한 독거노인이나 아동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며, 힘을 다하고 있다. 

비록 부활절 연합예배가 웅장하게 드려지지 아니했지만, 최선을 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생명을 무시하고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라는 막말하는 기독교인의 말을 들으면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어떻게 지금까지 거의 6주에 걸쳐서 고통받고 있는 교회와 성도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는 한국교회 앞에 반드시 그 말에 관하여 참회하여야 할 것이다.

 

지난 역사를 통한 4월은 도무지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현재 진행형이다. 임진년 왜군의 침략에 협조한 천주교는 ‘아시아판 십자군 전쟁’으로 ‘조선판 킬링필드’에 일조하였고,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제주도 도민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었고, 기도로 시작한 제헌국회라는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역사의식이 부족한 당시의 기독교는 이 민족에게 눈물을 주었다. 4월 혁명이라 명명된 그 함성에도 교회는 큰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에 공허함으로 남은 세월호를 향한 교회의 역할도 부족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장로들이 깨어나야 한다. 우리의 교회가 이 민족을 살리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장로들이 더 크게 헌신해야 한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자각하는 역사의식으로 재탄생되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갈망한다. 

/ 박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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