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인물탐방] 일제 강점기 신사(神社)가 예배당으로
"장로, 돈보다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 모범보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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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국장 기자 작성일2020-06-27 15:41본문
송화섭 장로(1938. 2. 5.)는 전북 전주시 여의동 584번지에서 부친 송주환 성도와 모친 이순례 집사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
▲ 동산교회와 장로님의 관계
제가 어린 시절 일제가 교회를 핍박하던 상징적인 것인 신사당(神社堂)이었지요. 그곳이 교회가 된 것은 기적 가운데 기적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10리 정도 떨어진 팔복동의 유상교회에 다니던 동산지역의 성도들의 기도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며 기도의 응답인데 이것이 우리 동산교회의 출발이 되었고요. 당시 저는 10세였지요. 그래서 저에게 동산교회는 저의 가정이며, 영혼의 안식처이며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정말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교회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 모태신앙인가요?
어떤 분들이 저에게 ‘아브라함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저는 유교집안의 7대 장손으로 태어나서 혼자 교회를 다니다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는 복을 받았지요. 부친께서도 하나님을 영접하셔서 성도로 모친은 집사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저희 집안에 목회자도 있는 신앙의 명문가문이 되어서 1년에 4회 정도 모임을 갖는 아주 행복한 믿음의 집안이 되어 있습니다.
장녀(송미애집사, 사위 하태양집사)와 아들(송재익 집사)가 교회를 함께 섬기고 있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권사님은 어떻게 만났나요?
제가 30세 제 아내가 28세로 결혼하였는데 당시로는 늦은 결혼이지요. 친구 노병덕(장로)의 소개로 예수병원의 간호사였던 아내를 알게 되었지요. 연애결혼은 아니고 중매결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 권사님은 어떤 분인가요?
제 아내(현, 81세)는 한마디로 천사입니다. 신앙이 아름답고 근검절약이 생활이 되어 있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는 제일 앞장을 서고, 성경을 사랑하여 성경 필사 5회(신구약)나 하는 신앙의 사람이지요.
전주예수병원에서 간호사로 38년을 근무하고 퇴직하였고요. 수년간 폐지를 모아 전주제지에 가져다 주고 복사지를 받아서 어려운 교회를 도왔고요. 월드비전에 10년이상 후원하여 상도 받았고요.
아내의 고향 익산시 춘포면에 ‘왕충교회’의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답니다. 예수병원 선교부의 지원과 친정할머니 나온선 집사의 토지 500여평을 증여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하였고요. 저희 부부가 종각을 세워주었으며, 금년 3월 50주년 행사에도 300만원을 헌금하여 교회부흥에 헌신하였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많은 봉사를 하였지요. 여러 직분을 맡아서 섬기고 식당봉사에 앞장서고, 전북노회 여전도회 회장도 2회 역임을 하면서 교회를 잘 섬겼지요.
▲ 청년 시절 이야기?
제가 동산교회 청년회 회장이 되었을 때 동산교회의 팔달로 주변에 있는 일곱 교회(동산, 유상,팔복, 덕진, 양동, 성덕, 구정) 청년들이 ‘칠성연합회’를 조직하여 순회예배, 주일학교 연합행사를 했답니다. 정말 감동과 은혜의 시간들이었고 각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처럼 활동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활동이 그립습니다.
▲ 동산교회에서는 어떻게 섬겼나요?
교회의 총각 집사가 되었지요. 게다가 회계를 담당하였답니다. 청년에서 장로에 이르기까지 8회에 걸쳐 교회 성전, 교육관과 사택 건축도 했습니다.
물론, 주일학교 교사와 부장, 찬양대의 지휘, 찬양대장 등도 했지요. 교회의 모든 부서를 섬겼다고 보면 됩니다. 교회의 사찰처럼 청소와 화단가꾸기도 다 했지요.
▲ 장로임직을 일찍하셨지요?
그동안 교회아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교단분립(기장)의 아픔 속에 1952년 교회 분립이라는 아픔을 겪었고요. 그 이후 교회도 초창기 선배들이 떠난 자리의 그 열정도 사라지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1969년 부임하신 김종은 목사님의 위임식 때 제4회 장로로 장립(32세)을 받게 되었답니다.
교회의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선임이시던 김봉희 장로님이 대전으로이사를 가게 됨으로 3년만에 선임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겼답니다.
▲ 기억에 남는 일은 ?
1961년에 교회가 있던 국유지 2,000평 입찰을 통보 받게 됩니다. 당시 경쟁 기관은 ‘조촌면 사무소, 천주교 조촌지부, 조천 한국청년단’ 등이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진영백 장로님을 통하여 300만원을 만들어서 입찰을 하러 갔는데 당일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서 우리 교회가 등록하여 허가를 받는 기적도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1961.5.16. 군사혁명으로 다른 기관이 입찰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원신 전도사님’과 있었던 성전건축의 추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28평의 교회가 130평의 교회로 건축하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었지요.
28평의 교회가 불편하여 40평의 교회로 건축하기로 당회의 결의가 있었는데 당시 총각 집사였던 제가 그 일에 가담하게 되면서 헌신을 하게 되고, 65평으로 건축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의 권유로 2차 협의를 거쳐서 2층 65평을 포함하여 130평으로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지붕과 창틀까지만 완상하여, 창은 비닐로, 바닥은 가마니를 펴고 예배를 드렸지요. 전도사님은 건축사명 완수하시고 다른 교회로 초빙받아서 가셨는데 교회의 재정은 바닥이 나고, 두 장로님은 서울로 이사를 가시는 등의 어려운 와중에 광주중앙교회에 부목사로 계시던 김종은 목사님께서 저희 교회로 부임하여 오셨습니다.
▲ 장로는 어떤 직분이라고 생각?
장로라고 하는 직분은 “몸으로 실천하는 직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교인 30명을 대표해서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영향력을 가지려면 몸으로 모범을 보야야 합니다. 그리기 위하여 ‘돈이 있어야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장로가 되어야 한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성도들에게는 신임을 얻고 덕을 쌓아서 섬기는 헌신의 자리에 내려가야 하는 것이 장로의 직분입니다.
송화섭 장로님, 오랜 시간 인터뷰에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은 여생 교회를 더 아름답게 섬기고, 더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송화섭 장로님은 어떤 분?
동산교회를 시무했던 이응윤 목사(은광교회)는 “송화섭 장로님은 정말 훌륭한 장로님입니다. 교회의 일이라면 헌신적인 분이었고, 열정이 남다른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교회를 떠나 있지만 다시 만나고 싶은 장로님입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박기성, 김종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