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받고 전도사로 교회 섬김 … 고아를 위한 부르심 
사회사업가, 아동문학가, 증경 부총회장, 명예문학박사

▲ 함평 삼애원 전경, 좌측부터, 어린이 숙소, 윤한식 장로가 기거하던 숙소, 사무실. 상단 원안의 사진은 윤한식 장로의 부친 윤태언 영수
▲ 함평 삼애원 전경, 좌측부터, 어린이 숙소, 윤한식 장로가 기거하던 숙소, 사무실. 상단 원안의 사진은 윤한식 장로의 부친 윤태언 영수

1952년 고 윤인식 장로(공화당 4선 국회의원, 국가 조찬기도회 창립자)가 설립한 함평 삼애원은 그 역사와 발자취가 한국교회의 귀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삼애원은 전쟁고아와 결손 가정의 새싹들의 보금자리로 지금까지 약 5,000여 명의 인재들을 사회로 배출했다. 

함평에 도착하여 ‘사회복지 법인 함평 삼애원(원장 윤강남 함평 중앙교회 권사)’을 방문했다. 수많은 인재를 양성한 곳이라기에 너무 초라한 모습이다. 낡은 건물들이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저희 삼애원은 세 가지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사랑(애신), 이웃사랑(애인), 일 사랑(애노)이고요, 기독교의 정신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현재 20명이 이곳에 함께 있습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아이들의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지금도 나무에 외로이 메달려 있다. 

옥동교회(함평노회 정반석 목사 시무)는 1926년 봄 전도인 박화윤씨의 전도로 윤태언씨가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가 세워지게 됐다. 1926년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삼현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1926년 12월부터 1928년 봄까지는 윤병남씨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1928년 봄까지 예배를 드리는 중 교회가 부흥하여 함평읍 해동에 있던 해동교회와 학교면 곡창리 고창산부락에 있는 교회를 폐쇄하여 옥동 청용에 이축하니 옥동 부락에 처음으로 교회당이 세워진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핍박이 심해 교회 벽을 일곱 번이나 파괴하고 불을 세 번이나 질렀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으로 예배당의 지붕만 약간 타고 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예배당이 보존됐다.

현재 옥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정반석 목사는 학교 교사로 오랜 시간 있었다. 부모가 목회자가 되라고 이름도 ‘반석’으로 지었다. 하나님의 소명으로 신학을 하고, 필리핀 민다나오 신학교의 행정을 맡아 있는 중 결혼식을 올렸던 바로 이 교회를 소개받았으며, 부임하는 기간도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부임하게 되었으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있다. 교회의 설립인 윤태언씨는 집사에서 영수로 추대가 되었으며, 역대 장로는 윤병진, 윤판문, 윤인식, 윤한식, 윤병삼 등이 있다. 

▲ 윤한식 장로의 선친 윤태언 영수가 설립한 옥동교회
▲ 윤한식 장로의 선친 윤태언 영수가 설립한 옥동교회

교회를 나와서 동네를 돌아보니 범상한 곳이 아니다.
임진왜란에 맞서 의병을 일으킨 파평 윤씨의 윤황 윤길, 윤제민의 인물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삼현정(三賢亭)’이 길가에 있다. 이 마을의 정신적 지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가꾸고 보존되지 못한 허술함이 아쉽다. 경복궁 경회루의 축소판으로 만든의 기와집의 담벼락에 ‘삼족오’의 와당(瓦當)이 빛바랜 모습도 관리가 아쉽다.

사회사업가이며 아동문학가로서 고아들과 결손 가정 자녀들의 아버지 역할을 66년이나 감당해 온 ‘동원(童園) 윤한식 장로(95세, 함평 옥동교회 원로장로)’와 그의 아내 ‘정영희 권사(90세)’를 만났다. 맑은 미소로 반겨 주시는 권사님이 이제 갓 70세의 어머니로 보인다. 매일 세 끼 식사를 손수 준비하시고 섬기는 권사님의 헌신적인 모습이 남편을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세웠으리라 짐작이 된다.

윤한식 장로는 1926년 9월 8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에서 출생하였다. 상옥리는 함평군의 명산 ‘철성산’의 동쪽에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이 있는 곳이다. 산은 푸르고, 물이 맑으며, 영산강 지류가 잔잔하게 흐르는 비옥한 들판이 있는 곳이다. 600년이 넘는 조선 시대의 가옥이 지금도 남아 있다. 

윤 장로는 부모의 자애로운 보살핌과 착하고 정직하고 근면하며 모범적인 생활을 보고 배우며 자라났다. 윤 장로의 부친은 윤 장로가 태어나던 해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옥동교회를 설립하는 헌신을 하게 된다. 두 아들을 기독교의 신앙으로 자라게 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일제의 악랄한 괴롭힘에 논과 밭을 소작으로 했던 부모가 봄부터 가을까지 땀 흘려 일을 하여도 겨우 식구들의 생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너무나 힘든 집안 형편이지만 부모의 열의로 ‘학다리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운동화를 신지 못하고, 부친이 엮어주는 짚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 

윤택한 생활을 하는 선배가 중학교 과정 통신강의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책을 빌려서 독학으로 공부하던 가운데 ‘함평 우체국’에 근무하는 지인의 소개로 우체국장의 추천을 받아서 1944년 4월 서울 원효로의 ‘체신이원양성소’에 합격하여 6개월간 전문 교육을 수료하고 목포우체국 사무원으로 발령되었다. 

해방 이후 목회자의 꿈을 가지고 우체국을 사임하고 ‘목포 고등성경학교(1950년 3월 졸업)’를 다니면서 신안군 지도읍 광정교회 전도사로 섬겼다. 졸업하자마자 동족상잔의 한국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신안군 지도읍은 당시에 ‘공비’의 만행이 가장 심했던 곳 중의 하나였고, 많은 사람이 순교한 곳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후에 무안군 일로면 구정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한국 전쟁 후에 사회적인 질서를 되찾을 때 형인 ‘윤인식’은 투표를 통하여 초대 도의원에 당선되자 고향에 전쟁고아들을 돌봐줄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하였다(1952.6.15.). 그것이 ‘함평 삼애원’이다. 정치에 바쁜 형을 대신하여 이곳을 관리할 책임자로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해부터 부원장으로 15년 원장으로 51년을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였다(2017.2.20.). 전쟁고아를 돌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당시에는 주로 미국의 구호물자로 운영을 하였다.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하기 어렵고 힘들었다. 1953년 4월 10일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을 하였고, 1954년 5월 12일 기독교 아동복지에 가입하여 1957년 2월 19일에 재단법인(현, 사회복지법인)의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 윤한식 장로(95세)와 정영희 권사(90세
▲ 윤한식 장로(95세)와 정영희 권사(90세

윤 장로는 이렇게 삼애원을 섬기고 있지만, 그의 아내는 8Km 떨어진 본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남편의 얼굴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불평이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늘 웃음으로 맞이하고 뒷바라지를 65년간 해 왔다. 지금은 90세의 노구를 마다하지 않고, 95세의 윤 장로를 챙기는 ‘천사 중의 천사’다.

윤 장로는 목회자의 꿈은 접었지만 의지할 곳, 갈 곳이 없고 보살핌이 필요한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전하였다. 사비로 장비를 구해서 매일 밤 10시에 방송을 통하여 청소년 범죄예방에 많은 헌신적인 노력도 하였다. 

개혁측 총회장을 역임한 정종한 목사, 윤낙중 목사, 합신 증경총회장 이주형 목사(인천)를 비롯하여 쟁쟁한 목회자를 길러내었다. 이러한 윤 장로의 삶은 스카우트, 사회사업가, 아동문학가로서 많은 사람에게 모범이 되어서 수많은 표창을 받았다. 미국 솔로몬 대학교에서는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고, 영국 캠브리지의 국제인물 약전에도 소개가 된 한국교회의 보배이다.   

☞ 2020.5.4. 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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